
꼭 할 말이 있어. 조만간 만나러 갈게.
발신자제한의 문자하나.
밑도 끝도 없는 그 문자를 받은 것은 대략 이주 전의 일이다. 발신자가 누군지 대강 감이 왔었지만 이즈쿠는 끝내 모른 척을 했다. 바쁘니까. 바쁠 것 같으니까. 계속 바빠야 하니까. 그런 뻔하고 치사한 핑계를 둘러대며 그 사람을 밀어낸 건 벌써 6년도 더 된 일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껄끄러울 것도 없을 만큼의 시간이었다. 나도 알고 너도 알지만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 나의 도망.
술래의 조건. 미도리야 이즈쿠를 붙잡을 것.
도망자의 조건. 토도로키 쇼토를 벗어날 것.
우리들은 지금 기약 없는 술래잡기를 하는 중이다.
마지막 선물
일본에서 가장 유망한 히어로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열에 여섯은 데쿠를 말한다. 히어로 데쿠. 유에이 출신이자 그 올마이트의 수제자로 알려진 미도리야 이즈쿠를 말하는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아니 이미 졸업 전부터 온갖 대형사건을 처리한 경력도 있다. 유에이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일부 여론들은 오히려 그가 사건을 몰고 다니는 것은 아니냐는 망언도 했었지만 여론은 자연스레 히어로 데쿠쪽으로 쏠리게 됐다. 안티들이 뭐라고 하던 그가 실력 있는 인재라는 사실은 확실했으니까. 화려한 개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하고 밋밋한 외견이 오히려 좋은 친근감을 준 걸지도 모른다.(귀를 의아하게 만들만큼 특이한 히어로명도 한몫을 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데쿠는 돌연 일본을 떠나게 됐다. 해외에서 날아온 러브콜에 응한 것이다. 사실 흔한 일은 아니다. 무려 히어로의 본고장 아메리카에서 직접 데쿠를 지명하다니. 여론은 아쉬워했지만 박수를 보냈다. 데쿠는 데뷔 3년차지만 그래도 아직 많이 어렸다. 스물 남짓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곳이 너무 많았다. 데쿠도 그걸 거절하지 않는 천성이었다. 꼭 자신이 가야만 하는 곳이라면. 하지만 아무리 히어로라 해도 데쿠 역시 사람이다. 그에게도 휴식기는 필요했고 자신만의 시간도 필요했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움으로써 성장하고 싶은 욕심도 분명 있을 것이다.
좀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습니다.
데쿠는 말했다. 아직 자신은 부족한 것이 너무도 많다고. 그 후로 약 3년. 데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른다. 데쿠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그리고 사실 데쿠가 떠난 진짜 이유도 몰랐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다.
***
미국 LA. 20xx년 7월 10일.
“데쿠씨. 국제전화 왔어요.”
“국제전화?”
“네. 잉게니움씨.”
데쿠의 비서 이안이 수화기를 흔들어보였다. 잉게니움이란 단어가 들리자마자 이즈쿠는 부랴부랴 제 자리로 향했다. 연결합니다. 이안이 수화기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이즈쿠는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이다?"
[오랜만이다. 미도리야.]
전선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즈쿠의 입꼬리는 귀에 걸렸고 커다란 눈은 곱게 접혔다. 이이다! 반가움과 기쁨에 벅찬 음성이 아주 우렁차게 울렸다. 사무소 직원들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지만 데쿠의 행복한 오오라는 못 본 척 해주기로 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부쩍 늘고 있는 해외 생활 3년차 히어로가 그들의 동료였다.
“히어로 엑스포에 온다고? 정말이야?”
[그래. 오랜만에 만나게 됐네.]
“그러게. 진짜 몇 년 만이야 이게….”
[아 참, 토도로키도 함께 간다.]
“……뭐?”
[축하할 일이 생겼어. 미도리야.]
“축하…?”
[결혼해. 토도로키. A반 첫 유부남의 탄생이야. 아직 공식발표는 안 했다. 지금 너한테 말하는 게 처음이야. 요즘 장기임무 중이라 대신 전달 좀 해달라고 부탁받았어. 식은 내년 봄에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
데쿠씨? 이안은 문득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에 이즈쿠를 바라보았다. 이즈쿠의 동공이 튀어나오기 직전이다. 그 혼자만 시간이 멈춘 듯 딱딱히 굳어버린 채로 말이다. 이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즈쿠는 여전히 멈춘 채다. 뭐야, 왜 저러시는 거야? 직원 모두의 시선이 하나 둘 모여든 후에야 이즈쿠는 버퍼링에서 벗어난 듯 고개를 굼뜨게 까닥였다. 다시 입을 움직인 것도 또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안은 상대방이 용케도 기다리네 싶었다.
“뭐하는 사람이야?”
[음?]
“토도로키 결혼상대. 히어로? 아니면 일반인?”
[…그건 나도 몰라. 정식발표 전까지 절대비밀이라고 하더군.]
“그래…?”
[결혼하기 전에 오랜만에 셋이 뭉치자고 하긴 했다만, 엑스포는 사실 핑계고 아마 널 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데. 너희 두 사람, 그 동안 전혀 연락하지 않았잖아.]
“이이다, 미안. 이제 슬슬 나가봐야 해.”
우다다 튀어나온 이즈쿠의 말에 이안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데쿠씨 오늘 일정은 전부 끝났을 텐데? 그러나 다시 이즈쿠를 돌아본 순간 이안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데쿠씨! 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다음 주 엑스포까지 아파도 되나요?”
“뭐?? 데쿠씨 엑스포 엄청 기대하지 않았어? 전 세계 히어로가 다 모이는 날이잖아!”
“그렇죠. 다 모이죠…하하, 하……흐윽.”
“데쿠씨??”
덜컹. 소리와 함께 수화기가 추락했다. 그리고 이즈쿠도 주저앉았다. 놀란 이안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삐-. 전화가 끊긴 수화기가 끊임없이 울었다. 이즈쿠도 함께 울었다. 아주 서럽게. 엉엉.
***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건 3년 전 해외 봉사가 마지막이었다. 누구 씨의 의도 덕에 겹쳐버린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다. 그때도 이즈쿠는 온갖 핑계를 대며 도망치려 했지만 그 먼 타지에서 대타를 구하는 것도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빠지는 것도 도저히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히어로가 약속을 하고 참여하기로 한 건데. 멋대로 빠져나온다는 건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아마 그 누구씨도 그 점을 이용했을 거다. 결국 그 때 이즈쿠는 약 삼주 간의 합숙을 해야만 했다. 전화도 안 터지고. 인터넷도 안 터지고.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도 지프차를 타야만 올 수 있는 그 외진 나라에. 도대체 어떡하면 우연히 올수 있는 거야? 토도로키.
“할 말이 뭐야? 토도로키군.”
“좋아해. 미도리야.”
사실 그동안 눈치는 있었다. 언제 사귀냐는 말까지 농담조로 들을 정도면 이미 말 다했다고 본다.
“아직도 안 사귀냐~?”
누군가가 그렇게 물으면 토도로키는 싫지 않은 기색으로 웃어넘겼다. 하지만 이즈쿠는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버리고 만다. 속내를 들켰다는 초조함과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절망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친구로서 하는 말, 아니지?”
“응.”
초조한 듯 떨리는 하늘빛 눈동자는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아. 넌 정말 강한 사람이구나. 강하고 아름다워. 사랑을 고백 받는 순간, 이즈쿠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유에이 고교 히어로과 빅3. 고3에 올라간 나와 너에게 붙은 호칭이었다. (덧붙여 캇짱까지) 그러니 교내에선 물론이고 각자가 일하는 인턴사무소에서 주는 기대와 책임감이 얼마나 큰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갖고 싶었고 꿈에 그리던 호칭이었다. 최종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분명 여기일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연애? 사랑? 생각조차 안했다. 아니 못했다. 이즈쿠에겐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대답은 당연히 “미안해.”이었다.
“알았어.”
쇼토는 의외로 담백하게 거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사실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었다던가?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 토도로키가 그럴 리는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실례야. 그래서 이즈쿠가 내린 결론은 토도로키군이 ‘이해’를 해준 거구나. 이었다.
왜 이 때는 몰랐을까.
쇼토가 말한 ‘알았어’의 의미는
포기가 아닌 대기라는 것을.
그 후로 약 3년. 일본에서 활동한 모든 시간 동안 쇼토는 이즈쿠의 곁에 맴돌았다. 시선이 닿는 곳엔 항상 그가 있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토도로키. 신분증대신 프로 면허증을 들고 다니게 된 후로 우리들의 호칭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예의차려 사용하던 ‘군’이란 명칭은 떼어버리고 현장에선 히어로명. 쇼토, 데쿠. 현장 이외에 장소에선 토도로키, 이즈쿠. 뭐로 부르던 똑같이 쇼토였을텐데. 이즈쿠는 꾸역꾸역 ‘토도로키’라는 호칭을 고집했다. 어떻게든 너와 나의 간격을 유지하려고. 이 이상 가까워지는 게 너무도 무서워서. 너와의 미래를 그리고 싶어 하는 내 자신의 현실이 죽도록 비참했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쇼토와의 관계에 염증을 느끼고 만 이즈쿠는 제 풀에 지쳐 해외로 떠났다. 거의 도망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또 3년. EMS로 날아오는 히어로 쇼토 사무소 봉투의 신년 연하장을 제외하곤 쇼토와는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2주 전 날아온 발신자 제한 메시지의 발신자는 쇼토라는 것을. 신년도 아니고 일본이나 미국에 특별한 사건이 있던 것도 아니다. 설마 또 들이닥치는 건가 싶었는데.
꼭 할 말이 있다더니 그게 결혼이었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이 제 속안에 가득했다. 바라고 바라던 쇼토의 포기가 아니던가. 심지어 새로운 사람을 찾았다고 하는데. 웃으며 보내줘야 하는 일일 텐데.
…뭘 웃으면서 보내줘. 애초에 내 곁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잖아.
토도로키군 결혼상대. 히어로? 아니면 일반인?
히어로면 어쩌고 일반인이면 어쩔 건데? 대답할 수 있는 건 없다. 누가 됐든 저보단 나은 처지일 것이다.
***
공항으로 가는 도로를 타면서 이즈쿠는 내내 고민하고 중얼댔다. 지금부터 마중하러 갈 이이다와 쇼토. 정확히는 쇼토와 어떻게 마주봐야할지 말이다. 부우웅. 푸른 승용차가 부드럽게 나아갔다.
처음 만나면 일단 가볍게 웃으면서 오른손을 들어보이자. 그러면 아마 이이다가 먼저 인사를 받아 줄테고, 다음엔 뒤따라 나온 토도로키랑도 적당히 안부를 주고받고 그리고 두 사람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어주고 자연스레 운전석에 앉는 거야. 둘 다 뒷좌석에 같이 앉으라고 하는 게 좋겠지? 호텔은 이미 네비에 찍어놨으니까 운전에 집중하면서 적당히 엑스포얘기를 하면 될 거야. 아니다, 호텔까진 거리가 좀 있으니까 엑스포 얘기만 하긴 좀 그런가? 그럼 동창들 안부 얘기를 꺼내면서….
[결혼해. 토도로키.]
커브를 돌리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참, 이 길은 익숙할 텐데.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이 과속주의 표지판에 꽂혔다. 그새 굳어버린 표정을 애써 풀어내며 이즈쿠는 안면근육을 끌어올렸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지만.
“…겨, 결혼한다며? 축하해 토도로키!”
…뭔가 어색해.
”토도로키, 결혼 축하해. 엄청 놀랐어. 상대는 어떤 사람이야?”
상대 얘기 하지 말자니까 그러네.
“와~결혼이라, 난 언제하지? 하하하하-!!”
나 진짜 미친거지!?!
끼이익-. 신호가 걸렸다.
“하아…….”
핸들을 잡고 있던 흉터 가득한 두 손을 맥없이 떨어뜨렸다. 이즈쿠는 온 몸에 쥐고 있던 힘을 빼버렸다. 쇼토와의 만남은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파김치가 된 느낌이다.
“뭐하는 거야….”
빠앙-!! 이즈쿠의 푸른 승용차가 경쾌한 비명을 내질렀다. 쿵쿵 머리를 박을 때마다 빵빵 계속 질렀다.
꼴사납다. 미도리야 이즈쿠.
***
가슴이 두근대고 입은 바짝바짝 마르고 동공은 불안한 듯 떨렸다. 이즈쿠가 지금 왜 이럴까? 이유는 분명하다. 두 사람이 타고 온 비행기가 드디어 도착을 알렸기 때문이다. 온갖 플랜카드가 북적이는 인파 사이에 멀뚱히 서서는 꼼짝도 안했다. 그저 문이 열릴 때마다 반반으로 나뉜 머리색을 찾을 뿐이었다. 백발이나 적발이 보이면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온몸에 피가 빠르게 식었다. 그 머리의 주인이 쇼토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약 1초. 아주 생사를 오가는 기분이었다.
“어머? 히어로 데쿠 맞죠?”
“네, 네?”
돌연 들려온 모국어에 고개가 돌아갔다. 일본에서 온 관광객 차림의 젊은 여성 하나가 이즈쿠를 알아본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사람이 반갑긴 했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닌데…!
“저 팬인데…혹시 괜찮으시면 사진 한 장 같이….”
“이즈쿠.”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했다. 다시 한 번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느릿느릿 돌아간 고개 너머로 보인 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백발과 적발이었다.
“토, 도로키.”
“죄송하지만 데쿠는 오늘 휴무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잉게니움?! 제 앞에 있던 여성에게서 놀란 고음이 튀어나왔다. 뒤따라 나타난 이이다가 여성의 앞을 자연스레 가로막았고 그 사이로 들어온 쇼토가 이즈쿠의 몸을 살며시 돌려 밀었다. 어? 어? 순식간에 일어난 두 사람의 연계 행동에 이즈쿠는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토, 토도로키.”
“일단 나가자.”
“어? 어….”
준비했던 인사는 하나도 못 했네…. 이즈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제 어깨를 잡은 쇼토의 두 손이 매우매우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손이 이렇게 컸나.
손이 닿은 곳의 감각이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게다가 뜨거웠다. 아니, 여름이니까… 더워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응응 그럴 거야. 별 쓸모없는 합리화를 하던 그 때. 쇼토의 손에 아주 약간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쇼토가 제 귓가로 얼굴을 숙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즈쿠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키, 키도 더 컸나…? 오랜만에 마주한 쇼토의 모든 것이 너무너무 낯설었다. 3년의 공백이다.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심장은….
“보고 싶었어. 이즈쿠.”
난 도대체 누굴 위해 도망친 걸까.
***
7년 전. 여름.
매미 소리가 지독히도 심했던 그 해의 여름은 정말 껌처럼 너에게 붙어 있곤 했다. 시원하니까. 한마디로 모든 설명이 가능한 날씨였다. 좋아한다는 자각은 없었다. 그저 함께 있으면 참 편안했다. 언제 찾아가도 반겨주는 안락한 고향의 풍경처럼. 그게 너였다.
‘미도리야’
네가 그렇게 불러주기만 하면 난 그저 웃으며 달려가곤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너 역시도 나에게 웃으며 달려오곤 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들은 쭉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의 눈동자 속 나와, 나의 눈동자 속 너는. 똑같은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이 옷도 올해가 마지막이네.”
“그러게.”
옷감이 제법 헤져버린 하복 상의를 바라보았다. 네가 입은 옷도 똑같이 낡아있었다. 고교 생활 3년. 참으로 길고도 아쉬운 시간. 울창한 수풀이 가득한 교내 숲속부지는 우리들의 전용 산책로였다. 평소에도 학생들은 많았지만 여름이 무르익게 되면 찾아오는 사람이 자연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얼음계 개성을 가진 네 덕분에 우리 두 사람만큼은 변함없이 찾아올 수 있었고. 양팔을 한껏 벌려도 껴안을 수 없을 만큼 큰 나무에 기대 앉아 우리들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굼뜨게 흐르는 구름 아래에서 이따금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손에 닿은 흙바닥은 의외로 차가웠다. 나무 그늘의 아래라서? 아니면 토도로키군 때문에? 별거 아닌 생각을 떠올리던 그 때. 흙바닥을 매만지던 새끼손가락에 무언가가 닿았다. 응? 갸웃거리며 고개를 드니 어딘가 굳은 표정의 네가 나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닿은 후 알 수 있었다. 너와 나의 새끼손가락이 엮여있다는 사실을.
“토도로키군…?”
쏴아아-. 선선했던 미풍이 강하게 일었다. 우리들의 옷도 머리도 모든 것을 휩쓸고는 유유히 하늘로 떠나버렸다. 엉망으로 휘날린 옷가지를 매만질 여유도 없이 우리들은 그저 서로의 눈동자 속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눈을 맞춘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네 마음과 내 마음을 자각한 심장만이 홀로 바쁘게 뛰어댈 뿐이었다.
“잘 지냈어? 이즈쿠.”
“여전히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다. 미도리야.”
“으응…. 두 사람도 잘 지냈지? 이이다, 토도로키.”
기쁨에 찬 쇼토의 눈빛은 7년 전 그날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 눈빛에 서려있는 행복은 분명 저를 향한 게 아닐 것이다. 이제 자신 따윈 눈에 찰 리가 없을 것이다. 쇼토의 왼손 약지에 끼어진 약혼반지가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그날 두 사람을 호텔까지 데려다주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횡설수설 엑스포 이야기를 떠들었던 것 같다. 준비했던 말들이 전부 다 뒤섞이는 바람에 아마 제대로 된 소리는 안했을거다. 그저 단 한마디.
결혼 축하해. 토도로키.
가장 하고 싶었던 그 말만큼은 끝내 하지 못했다.
***
7월 15일. 엑스포 당일.
엑스포에 참석하는 히어로들은 코스튬 장착이 원칙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쇼토와 이이다의 코스튬은 고교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라 할 말은 없었지만. 셋이 이러고 있으니 꼭 뒷골목이라도 가야할 것 같군. 쇼토의 농담 반 진담 반 우스갯소리를 듣고 나니 고교시절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먼지 더미 상처투성이로 뒷골목에서 구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엑스포 자체는 사교 모임 겸 연구 발표회였다. 프로히어로 6년차인 지금도 이런 자리는 떨리기만 한다. 존경하는 각지의 히어로가 전부 모이는 건 흔치 않으니 이럴 때 만큼은 얼굴에 철판 깔고 다가가고 싶었는데. 그러나 도저히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엑스포가 시작되고 얼마 후 쇼토가 속삭였던 말이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즈쿠. 엑스포 끝나고 시간 좀 내줘.”
“어?”
“할 말, 아직 안했으니까.”
그 말을 듣고 솔직히 좀 멍해졌다.
할 말? 결혼한단 소리 아니었나?
뭔가 다른 게 더 있는 건가??
그때부터 이즈쿠의 머릿속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온갖 드라마틱한 상황들이 판을 쳤다. 올마이트 명명의 난센스 프린스. 그 별명은 여전히 건재했다. 제가 상상한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어째선지 쇼토의 불행으로 이어졌고 그 때마다 이즈쿠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있는 힘껏 부정했다.
도대체..도대체 무슨 말이지?!
“이즈쿠. 이제 갈까?”
“응?! 가다니? 아직 행사 중…어라?”
“엑스포 끝났는데.”
“뭣!”
“이이다는 먼저 보냈어. 우리도 가자. 이제 시간이-.”
“시간…? 무슨 시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답지 않게 동요하는 모습이 좀 의아했지만 서슴없이 제 손을 잡는 쇼토의 손길에 의아함 따위는 그새 잊어버리고 말았다.
***
좀 걸을까,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쇼토가 말했다. 한적한 곳을 아냐고 묻기에 이즈쿠는 바로 그럼 저기로 갈까? 하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하지만 말을 꺼내고 바로 후회했다. 엑스포장 맞은편에 조성된 인공호수는 데이트 코스 명소이기 때문이다.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책로는 커플들의 고백이 성사될 확률이 꽤 크다고 들었다. 이즈쿠는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제로 와 본적은 몇 번 있지만 전부 임무를 위해 스쳐간 정도. 한 마디로 이즈쿠와는 연이 없는 장소다.
“LA는 꽤 시원하네.”
그런데 설마 이 곳을 토도로키와 오게 되다니.
…예비 신랑이지만.
구태여 붙인 뒷마디가 바늘처럼 심장을 찔렀다. 진짜 왜 이러니 나…. 애써 떠오른 생각을 떨쳐내며 이즈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뜰 때는 최대한 밝게. 웃으면서 마주보았다.
“일본도 저녁엔 쌀쌀하지 않아?”
“글쎄…. 체온조절이 버릇이 돼서 말이야.”
“아…하긴, 옛날에도 그랬지? 같이 조깅할 때도 항상 나만 땀 뻘뻘 흘렸으니까.”
“기억하는 구나.”
“당연하…!”
아차, 옛날 얘길 하는 게 아닌데…! 우뚝 멈춰서버렸다. 이즈쿠는 반쯤 벌린 입을 급히 다물었다.
“? 왜 그래.”
앞서 걷던 쇼토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재킷 주머니에 꽁꽁 숨겨놨던 양손을 꺼내면서 이즈쿠를 바라본다. 은은한 빛을 비추는 가로등 아래는 꽤 훤했지만 그래도 하늘은 검었다. 그 어둠 속에서 쇼토의 약혼반지가 반짝이지 않을 리가 없다.
말해야 해.
입술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빨리…결혼 축하한다고 말하라고. 쇼토가 눈앞에 있는 이 순간.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말할 수 있을까. 만날 날이 또 오기나 할까? 웃을 수는 있을까?
아마도 아니 분명히. 오늘이 마지막.
앞으로 영영 마주치지 못할 사이가 되겠지.
이즈쿠는 다짐하며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방황하던 이즈쿠의 동공이 움직였다. 느리지만 올곧게. 쇼토의 눈동자를 향해서.
“토도로키. 나, 나…나도, 나도 널-.”
어라?
“많이 보고 싶었어!”
뭣?! 나,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결혼 축하, 못 하겠어. 정말 미안해. 왜냐면 난 아직도 널-.”
멈춰! 멈추라고 이 데쿠야---!!!
“좋아해…!”
……아. 올마이트. 전 지금 자백 개성이라도 걸린 건가요. 그렇다고 해주세요.
“…….”
“…….”
한 번 터진 본심은 고장 난 수도 마냥 멈출 줄을 몰랐다. 제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본성과 이성 중 설마 이성이 지다니. 사실 본성이 이길 때가 많다는 건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이 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끝끝내 못했다. 결혼축하. 축하는커녕 남의 인생에 잿더미를 뿌리다니. 예비 신랑한테 무슨 망언을 한 것인가 대체.
“…하하.”
그런데 그 때 이상한 웃음이 들려왔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애매한 웃음. 웃음이라기 보단 흐느낌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즈쿠.”
“……으응?”
“생일 축하해.”
……생일?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물론 오늘은 이즈쿠의 생일이 맞다. 하지만 갑자기 생일이라니.
“그게 내 할 말이었어. 올해는 늦지 않아 다행이야.”
“…생일 축하가, 할 말이었다고?”
“응.”
“겨우 그 말 하나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결혼한다는 말 하러 온 거 아니었어??”
놀라움을 넘어선 허탈감이었다. 생일이라니. 미국에 오고부터 그런 건 진즉에 안 챙기게 됐었다.
“…나는, 너랑 아무사이도 아닌 사람이니까.”
이즈쿠의 침묵 속에서 쇼토가 꺼낸 것은 다소 갑작스러운 발언이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건지 이즈쿠는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지금 해외에 있는 네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다면, 가장 먼저 연락이 가는 건 누구라고 생각해?”
“…그건..”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쇼토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 답을 아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줄곧 생각했어. 우리들은 히어로니까 매일매일 당연한 듯 사람들을 구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너무 많다는 걸.”
수많은 생명과 만나고 수많은 생명과 이별하는 나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생명을. 누군가의 삶을. 이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구한 생명의 시간이 다시 평화로이 흘러가는 걸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리 뻗어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은 분명히 존재했다. 죽음과 마주하고 시간 위에 멈춰서는 생명이 항상 제 눈앞에 놓이고 만다.
너 역시도 나에겐 그런 존재였다.
“고작 한마디지만 나에겐 소중하니까. 이즈쿠. 나는…올해도 무사히 네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에 감사해.”
“토도로키….”
“그리고, 결혼은 거짓말이니까.”
“…….”
“…….”
……뭐라고요?
이즈쿠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고백까지 받을 줄은 몰랐네. 질투했어?”
화아악. 질투라는 단어가 들린 순간 이즈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갛게 열이 오르고 말았다.
“뭐, 무슨, 너 무슨 그런 거짓말을!! 아니 그럼 그 반지는?! 약혼반지라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려나.”
펄쩍 뛰며 광분하는 이즈쿠와 달리 쇼토는 덤덤히 재킷 주머니를 뒤졌다.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조그마한 상자. 딸깍 열리며 나타난 건 쇼토의 약지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은색 반지였다. 그 반지를 발견하고 이즈쿠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쇼토가 꺼낸 반지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즈쿠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너, 너 내가 또 거절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거 생일 선물이야. 다른 의미가 아니고.”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응. 프러포즈는 다음에 제대로 할 거거든.”
“뭐? 프, 프러포즈?”
“아버지랑 약속한 게 있어.”
“…?”
“올해부터 미국지사로 좌천시켜주기로.”
“……너희 사무소 미국지사도 있었어?
“없는데.”
“그럼 이제부터 만들 계획이야?”
“글쎄.”
“너 진짜…….”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쇼토는 아주 조금씩 이즈쿠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이즈쿠는 알아버렸다. 결혼이란 한마디에 너무도 솔직하고 말았다는 것을. 제가 어딜 가든 쇼토는 분명 또 나타날 것이고 또 뜬금없는 소릴 하면서 당연한 듯 따라올 것이란 것을. 짊어진 짐들을 우선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맞는 일인지 이젠 모르게 됐다. …아니, 이미 다 알아버렸지 않은가. 3년 전 도망을 선택한 다짐이 허무할 만큼, 제 본심은 변치 않았다는 것을.
“일단 돌아가고 겨울쯤 올게.”
“오지마.”
“…….”
“오지마, 쇼토.”
“…이즈쿠, 나는-.”
“내가 갈게.”
“……뭐?”
홱! 잡아챈 것은 쇼토가 들고 있던 반지 케이스였다. 고집스레 그 상자를 움켜쥐곤 이즈쿠는 다소 거친 움직임으로 쇼토의 재킷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쇼토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순간 휘청인 두 사람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닿을 것 같았다.
“…이게 마지막이야.”
“….”
“다시는 여기서, 생일 축하 안 받을 거니까…! 윽, 흑, 흐윽…!”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파르르 떨린 두 입술이 이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즈쿠는 엉엉 아주 서럽게 울음을 토해냈다. 쇼토는 조용히 그를 품었다. 최대한 세게 끌어안으며 전해지는 떨림을 받아주기 위해. 어떤 책임감과 무게가 너를 외롭게 만든 것일까. 허나 쇼토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 몰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저 너의 곁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풍파를 함께 맞고 싶어.
어딘지 모를 타지에서 닿지 않는 네 소식에 전전긍긍하던 나날들이 이제는 없기를 바랐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너의 시간이 멈추지 않기를.
너의 생명이 이어지는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를.
생일 축하해. 미도리야 이즈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