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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야 이즈쿠, 너의 생을 축하하며

 

 

 

“우리 카츠키는 전생에 물고기였을 거야.”

 

유년시절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해변에서 한창 놀고 돌아온 어린 바쿠고의 몸에서 바닷물이 뚝뚝 떨어질 때, 어머니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두 식구가 살기에 너무 넓어진 거실에 홀로 앉아 있던 어머니. 아버지가 도망가고 섬에 남겨진 어머니. 그녀는 어린 바쿠고의 눈에도 너무 작아 보였다. 이렇게 바다를 사랑하는 걸 보니 전생에 물고기였을 거야. 그 말을 들은 바쿠고는 손끝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냐. 틀려. 나는 바다를 사랑하지 않아. 그런 말을 되뇌면서도 바쿠고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어김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나는 이 섬을 떠나지 않아. 그럼에도 사는 게 혼란스러워지면 몸이 바다를 찾았다.

 

심호흡을 크게 내뱉는다. 흰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성큼성큼 달리기 시작한다. 목표 지점은 해안절벽. 절벽에서는 발이 저릿해지는 공포에 몸을 떠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바쿠고는 그 공포에 달려든다. 도약跳躍. 다큐멘터리에 나올 법한 이름 모를 야생의 새처럼 뛰어오른다. 다이빙. 눈 시리게 푸른 천공에서부터 하강한다. 순식간에 수면을 뚫는 두 발. 공기방울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귀속으로 시끄럽게 바닷물이 들어찬다. 바쿠고는 언제나 그 노이즈 속에서 안정을 느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바다를 찾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사채업자는 기어코 외딴섬까지 찾아왔고, 어머니는 친척들과의 통화에 언성을 높이다 가슴을 두드렸고, 바쿠고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혹은 극도로 예민해진 어머니에게 뺨을 맞았다. 바쿠고는 성장통을 앓을 때마다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의 공허와 충실은 무한한 위안이자 굴레 그 자체였다. 바다에 뛰어드는 행위는 유사 자살인 동시에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 이 섬을 벗어나고 싶은데, 무너지는 어머니를 지켜내고 싶었다. 죽고 싶은데, 살고 싶었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제대로 살고 있는지, 살고 싶긴 한 건지. 그런 고민에 뚜렷한 답을 달 수 있는 미성년은 없다지만, 그래도 답을 찾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지켜낼 수 있는 것도, 내 것이라고는 없는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너의 바다

 

 

미도리야와 바쿠고의 첫 만남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그날도 바쿠고는 정규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하교했다. 담임 선생님에게 얻어맞은 탓에 오른쪽 입꼬리가 터져 있었다. 밀린 급식비 때문이었다. 가난도 학교도 피로하고 지긋지긋하다. 바다에 뛰어들기 위해 웃옷을 훌렁 벗을 때, 그 초록빛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미도리야는 막 이 섬에 도착한 참이었다. 미도리야는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고, 바쿠고는 그저 한여름에 긴 니트 가디건을 걸친 미도리야가 별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머니가 짐을 내리고 차를 부르는 동안, 미도리야는 선착장 앞에 서서 바쿠고를 바라보았다. 우아한 곡선을 그려내며 해안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넋 놓고 감상했다. 말 그대로 감상이었다. 도심의 극장에서 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공연 같았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소년의 모습은 아름답고 용감했다. 미도리야는 작게 와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미도리야는 그 소년을 보기 위해 매일같이 해안가로 나섰다. 부둣가 벤치에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그 공연을 감상했다. 바쿠고는 엉겁결에 생긴 관객이 내심 신경 쓰였다. 몸이 아파서 요양하러 온 녀석이라고 들었다. 유명인사가 온 것도 아닌데 섬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저런 얼빠진 모습을 보니 도시 사람 별거 없구나 싶다. 낯짝이라도 봐야겠다 싶어 헤엄을 쳐서 가까이 갔을 때였다. 그런데, 젠장……. 그 망할 초록머리칼의 소년이 생각보다 예쁜 거다.

 

혼미한 건 미도리야도 마찬가지였다.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이.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가. 또렷한 적안이. 대단히 아픈 날도 아닌데 현기증이 일었다. 굴곡진 콧대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까지 예뻤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있냐. 데쿠같이.”

“…… 나?”

“여기에 데쿠 같은 게 너 말고 또 있냐.”

 

난데없이 뛰는 심장이 당황스러워서 괜히 말이 퉁명스럽게 나간다. 미도리야는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바쿠고는 부둣가를 손으로 짚고 육지 위로 올라섰다. 절벽으로 돌아가 바위에 걸쳐둔 웃옷을 챙겨서 내려왔을 때, 미도리야는 고작 저만큼만 멀어진 상태였다.

 

미도리야의 힘없는 걸음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불안정했다. 그래도 건넛집에 사는 녀석이고, 길에서 쓰러지면 이웃들이 또 난리 칠 게 뻔하고……. 바쿠고는 이런저런 핑계 같은 이유를 스스로에게 대며 멀찍이 거리를 두고 미도리야를 따라 걸었다. 찔끔찔끔 걷는 모양새가 답답했지만 그만 두지는 않았다.

 

멀지도 않은 거리를 오래도록 걸었다. 미도리야가 비척비척 걸을 때마다 긴 가디건이 살랑거렸다. 미도리야가 무사히 집앞에 도착하고, 낡은 철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바쿠고는 한숨을 내쉰다. 빌어먹을,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별것도 아닌 놈의 귀가를 몰래 배웅한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발끝에 치이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괜한 성질을 부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골목을 떠나기도 전에 큰 소리가 들려온다. 무언가 크게 넘어지는 소리. 바쿠고는 미도리야가 기어코 넘어진 거라고 추측했다. 쯧, 성가시게…. 인상을 찌푸리고서 초록대문 집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낮은 담 너머를 살피기도 전에 바쿠고는 소리로만 흠칫 알아차린다. 익숙한 불행의 소리를. 날카로운 언성. 어른들끼리 내지르는 고함 속에 미도리야의 기어드는 목소리가 섞여든다.

 

“엄마, 엄마 그만해……. 삼촌도 그만하세요.”

 

미도리야가 넘어진 몸을 일으켜 제 엄마의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엄마는 좀체 진정하지 못 하고 마루에 올려둔 화분을 집어던졌다. 돌담에 부딪힌 토기 화분이 날카롭게 깨지고, 그녀의 몸부림에 미도리야는 나가떨어진다. 미도리야는 이제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무릎을 끌어 모은 채로 구석에 쭈그린다.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어딘가에 부딪힌 건지 왼쪽 광대가 붉게 부어 있었다. 그 아수라를 보고 있는 바쿠고의 심장박동이 트라우마로 발작했다. 환영. 어른들 고함 사이에서 미도리야의 위축된 어깨에 자꾸만 어린 자신이 겹친다. 두통이 찾아온다. 그때, 불현듯 고개를 든 미도리야와 눈이 마주친다. 씨발…. 바쿠고는 청록색 철문을 등지고 도망치듯 길을 내달렸다

 

 

바쿠고는 좀체 잠이 오질 않았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영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미도리야를 그곳에 버려두고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언성을 높이는 어른들 사이에서 잔뜩 어깨를 웅크리고 있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젠장. 애가 아파서 요양시키러 온 거 아니었냐고. 어른 새끼들이란 왜 이런 식인 건지. 어른들의 산수와 싸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선다.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다. 또 다시 산책이라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며 초록 대문이 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길목에서 걸음이 멈춘다. 미도리야가 있었다. 미도리야는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하늘을 응시했다. 몰두하는 눈빛이었다. 뭐가 있나, 따라서 확인할 정도로.

 

“뭐 하냐.”

 

잠시 놀란 이즈쿠가 옅게 웃으면서 소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가디건 아래로 드러난 손목이 희다. 눈 밑에 남은 붉은 흉이 안쓰러웠다. 바쿠고는 터덜터덜 걸어가 그 옆에 털썩 앉았다. 미도리야는 별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도시에서는 별이 안 보이는 날도 많다고. 그 말에 되려 바쿠고가 놀란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쪼그려 앉았다. 미도리야가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별자리를 따라 그리면서 별 이름을 조잘거렸다. 바쿠고는 별 쓸데없는 지식을 쌓아뒀냐고 핀잔하면서도 귀를 열어두었다. 게다가 미도리야의 긴 가디건이 땅에 닿지 않게 몰래 잡아주고 있었다.

 

“캇쨩, 저기 왼쪽에 보여? 이렇게 이렇게 생긴 거.”

“하? 갈매기 새끼 같은 거?”

“앗… 응! 저건 카시오페아 자리야. 에티오피아의 왕비였는데 허영심이 많아서 포세이돈이 미워했대. 그리고 저기는 게자리! 헤라를 돕다가 헤라클레스 발에 밟혀서 한 쪽 발이 부러져서 죽었대. 헤라가 그 게를 하늘로 올려서 만든 별자리로 만든 거야. 그래서 저기에 한 쪽 다리가 없어.”

 

밤하늘도 별도 신화도 관심 없었지만, 하늘 높이 손을 뻗고 조잘대는 미도리야가 신나 보여서 내버려두었다. 미도리야의 얼굴을 흘끔흘끔 바라봤다. 얘기는 별로인데 반짝이는 두 눈이나, 중얼거릴 때 턱을 괴는 습관이나, 돌연 환해지는 표정 등이 볼 만했다.

 

“아하하, 재미없었지? 병실 안에서 책만 읽어서 따분한 말밖에 할 줄 몰라. 부끄럽지만 친구도 없어서, 친구한테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왠지 미안.”

“하? 지금 나보고 네 녀석 친구라는 거냐?”

“앗……. 그것도 미, 미안.”

“굽실거리는 거나 고쳐. 그런 태도가 등신 같다는 거다. 네 얘기가 문제가 아니라.”

 

검지로 이마를 쿡쿡 찌르면서 말한다. 그러자 미도리야가 속없는 사람처럼 베시시 웃는다. 기가 차네…. 바쿠고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면서 일어선다.

 

“간다.”

“……벌써?”

“내일은 친구가 좋아할 만한 얘기로 생각해서 와라. 책 얘기 말고.”

“캇쨩……! 응!”

 

골목길을 나서는 걸음마다 “잘 자, 좋은 꿈 꿔, 내일, 내일도 다이빙하러 갈 거야? 내일 바다로 갈게! 내일 봐!” 같은 말들이 따라 붙었다. 미도리야가 계속 ‘와아, 내일 보쟤…’하고 중얼거렸다.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등지고서 몰래 씩, 웃고 있었다는 것. 이건 미도리야가 평생 모를 풍경이었다.

 

다음날 미도리야는 점심을 여느 날보다 더 기운차게 먹었다. 바다로 향할 때는 오늘 또 바쿠고를 만날 수 있다고 기대하면서도, 혹여 못 만나더라도 서운해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쁜 걸음으로 해안가로 나선 바람에 미도리야는 숨을 헐떡거렸다. 그래도 금방 얼굴이 환해졌다. 저 멀리 해변에서 바쿠고가 교복바지를 걷어 올리고 발끝으로 퍽퍽, 바닷물을 튀기며 미도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

 

 

둘은 틈만 나면 만났음에도, 더 자주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미도리야는 허구한 날 바람 쐬고 싶다면서 해안가로 향했고, 밤에는 엄마 몰래 살금살금 집을 나섰다. 미도리야는 이제 소리 안 내고 철문을 여는 방법까지 터득했다. 외출 허락을 못 받은 날에는 바쿠고가 창문으로 조약돌을 던졌다. “무슨 짓이야, 캇쨩. 들키면 어떡해…!” 라고 말하면서도 둘은 창문 너머, 담 너머로 보이는 얼굴을 보며 키들거렸다.

 

미도리야가 특히 좋아하는 건 바쿠고의 다이빙이었다. 사실 바쿠고는 미도리야가 말해 주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하는 행동이 다이빙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 했었다. 그냥, 뛰어들고 싶어서 뛰어드는 건데. 다이빙이라고 뭔 스포츠가 있다고 하더라. 미도리야가 이름을 붙여 준 날부터, 바다에 뛰어드는 행위는 유사 자살도 살고 싶은 발악도 아닌, 그저 다이빙이 되었다.

 

게다가 다이빙을 하는 동기까지 달라졌다. 이제는 화가 나거나 슬퍼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절벽으로 뛰어들었다. 이건 미도리야를 위해 펼치는 공연이었다. 바다에 뛰어들면 이제는 공허가 아닌 미도리야가 밀려왔다. 보고 있지 않아도 미도리야의 기쁜 표정이 두 눈 가득 들어찼다. “우와, 지인짜 멋있어. 캇쨩!” 하고 두 눈을 반짝이며 헤실거리는 얼굴. 그 천진난만한 얼굴을 생각하면 우습고, 즐거웠다. 학교에서도 그 얼굴만 상상해도 따분하지 않을 만큼, 재밌는 표정이었다. 싱거운 얼굴인데, 어떻게 그렇게 재밌지. 수업 시간 내내 바쿠고는 상상 속에서 미도리야를 수도 없이 콕콕 건들였다. 콕 찌르면 울먹이고, 또 콕 찌르면 놀라고, 다시 콕 찌르면 베시시 웃었다. 그러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고, 금세 미도리야를 만날 시간이 되었다.

 

만나면 한날한시가 아까운 듯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이런저런 것들을 했다. 질문을 던지고, 과거 일들을 고백했다. 장난 치고, 시비 걸고, 놀리고, 짜증내고, 웃었다. 미도리야는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날은 바쿠고가 도망간 아버지 얘기를 해 준 날이었다. 어찌나 줄줄 울던지. 반면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슬픈 얘기를 들으면 울음보다 화가 울컥 치솟았다.

 

“너희 집안은 왜 당하고만 사냐, 등신 새끼들이냐?”

 

그래도 미도리야는 왈칵 화내면서 “나가 죽어”라고 말하는 바쿠고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바쿠고는 그런 애였다. “평생 그렇게 살든가, 얼간이 자식아.” 하고 신경질적으로 바닷물을 훅 튀길 때에도 몸이 젖지 않도록 부러 애먼 곳을 향해 뿌렸다. 처음으로 바다에 발을 담그고 걸었을 때 “그 정도밖에 못 들어오냐? 겁쟁이 새끼.”라고 핀잔주면서도 물장난이 끝나면 교복 셔츠를 벗어서 다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는 애였다.

 

그래도 그날 저녁은 화가 아닌 다른 감정에 울컥했다. 다이빙하는 바쿠고를 구경하고, 모래사장을 실컷 뛰어놀았던 날이었다. 미도리야는 손으로 모래성을 쌓았다가 허물기를 반복하면서 어물어물 말을 꺼냈다.

 

“나 어제 생일이었다.”

“뭐?”

 

전혀 몰랐다. 알 도리가 없으니 당연한 거였다. 말을 안 해 주면 어떻게 아냐고. 바쿠고는 또 가슴이 답답해져서 짜증을 낸다. “말 안 했으면 그대로 끝인 거지. 뒤늦게 뭐 달라고 하지 마라. 죽인다.” 미도리야가 푸스스 웃는다.

 

“있잖아, 나는 생일을 거의 병원에서 맞았어. 생크림은 몸에 안 좋다고 생일마다 엄마가 만든 당근케이크를 먹는데 생크림도 없고 퍽퍽하고, 솔직히 엄청 맛없다. 병원 밖에서 맞는 생일도 별로였어. 병실이나 들락날락하고, 축구도 못 하고, 픽픽 쓰러지고, 퍼뜩하면 울기나 해서… 친구랑 생일 파티 같은 것도……. 그래도 파티까지는 아니어도 무난하게 보내고 싶었는데 그것도 잘 안 되더라.”

 

……

 

“초등학생 때였나. 매달 15일마다 그 달에 생일인 애들이 교탁 앞에서 다 같이 축하받는 시간이 있었거든. 내 생일이 딱 7월 15일이잖아. 나는 내 생일날 축하받는 게 너무 기쁜 거야. 애들이 노래도 불러주고 생크림케이크도 처음이고……. 노래가 끝나고 7월 생일인 친구들이 다 같이 촛불을 불었다? 이제 케이크를 나눠 먹어야 하는데 반 애들이 수군거리는 거야. 안 먹겠다고. 내가 바람을 부는 바람에 케이크가 썩었다는 거야. 쌤은 막 당황하고……. 결국 그 케이크 내가 들고 집에 가게 됐는데 그냥 길에 버리고 왔어. 그리고 엄마 품에 안겨서 엄청 울었지. 엄마 나는 생일이 싫다구.”

 

……

 

“근데 캇쨩, 나 아직도 생일이 싫다. 내 생이 싫어…….”

 

미도리야는 그렇게 말하고선 하얗게 웃었다.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쓰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손은 쉬지 않고 모래성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바쿠고의 입안이 썼다. 그러다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바다로 들어가는 바쿠고. 두 손 가득 물을 담아온 채로 돌아온다. 그 물을 미도리야의 모래성 위로 끼얹는다.

 

“캇쨩……?”

 

미도리야가 쌓아 둔 허술한 모래성 위로 살을 덧붙인다. 단단하게. 허물어지지 않도록. 낮은 원기둥을 만들어내면서 담담하게 입을 연다.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무표정한 얼굴을 멍하게 바라본다.

 

“나쁜 생이 어디 있냐. 남의 생을 괴롭게 만드는 놈들이 뒈져야 할 놈들이지.”

“…….”

“축하 못 받을 생도 없고.”

“…….”

 

투박한 손으로 만들어진 모래 원기둥. 그 가운데에 나뭇가지 하나를 쑥 꽂는다. 미도리야의 아픈 얼굴이 환하게 허물어진다. 손에 굳은 모래를 툭툭 털어내는 바쿠고의 시선이 미도리야를 비껴갔다. 부끄럼을 타는 것이다. 미도리야는 눈치껏 그 나뭇가지를 후, 분다. 나뭇가지가 넘어질 만큼, 눈을 질끈 감고 세게 후, 하고. 그리고는 활짝 웃는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고마… 우앗!”

 

고마워, 캇쨩. 하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손목을 그러쥐고 잡아당겼다. 별거 아닌 거에 훌쩍이지 말라고.

 

“가자.”

 

엉겁결에 몸을 세우고 바쿠고를 따라간다. 미도리야를 끌어당긴다. 끌고 걷자 미도리야가 허둥거리며 휘청인다. 쯧, 혀를 찬 바쿠고가 무릎을 굽혔다.

 

“괘, 괜찮아…!”

“닥치고 업혀라.”

“아니야! 아냐, 괜찮아!”

 

인상을 팍 찌푸리고선 돌아본다. 그럼에도 미도리야는 손사래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괜찮아! 잠깐 잠깐, 그 전에 우리 어디 가는 건데?!”

 

한숨을 쉰다. 말 좀 곱게 들으면 어디가 덧나냐. 바쿠고는 대답 대신 미도리야를 번쩍 들어 안았다. 미도리야가 불안한 듯 바쿠고의 옷자락을 손끝으로 잡고 꼬물거린다. 안은 채로 절벽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른다. 그러자 미도리야가 화들짝 놀라며 발을 버둥거렸다.

 

“설마?! 아니지…? 안 돼. 나 못해!”

“못하는 게 어디 있냐. 안 하는 거지.”

 

절벽 끝에 다다르자 파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미도리야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고 버둥거렸다.

 

“데쿠, 나 봐.”

“…….”

“침착하고.”

 

그 말에 마법같이 미도리야의 행동이 멈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바쿠고를 올려다본다. 찌푸린 인상을 풀어낸 바쿠고의 무표정한 얼굴은 한없이 고요해서 미도리야도 따라 차분해졌다. 여기까지 데려온 건 바쿠고 순전 자신의 욕심이 맞았다. 그런데, 어떠한 감도 있었다. 미도리야도 충분히 해낼 거라는 믿음이. 뭐 자기만큼은 아니겠지만. 여태 동경했잖아. 동경만 하지 말고 너도 한번 해 보라고. 데쿠라고 매번 기죽고 움츠리고 살라는 법은 없잖냐.

 

“할 수 있겠냐.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그만 두고.”

“……”

 

눈을 맞추고 숨을 고르던 미도리야가 입술을 앙 다물고, 짐짓 굳센 표정을 지어보였다. 바쿠고가 씨익, 웃는다.

 

“어디 한번 남들은 평생 못할 생일파티를 해 보자고.”

 

미도리야를 들어 안은 두 팔 근육에 힘을 주고, 달렸다. 미도리야가 눈을 질끈 감는다. 두 소년의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린다. 바쿠고의 두 발이 공중 위로 떠오를 때, 미도리야가 눈을 뜬다. 별들이, 유성우가, 그 코끝을 간질이는 바쿠고의 머리칼이. 두 눈 속에 쏟아졌다. 슬로우 모션으로 그 모든 풍경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와-. 바쿠고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미도리야의 입으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풍덩, 투명한 파열음. 두 소년이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가, 빠져나온다. 두 눈을 마주하자 웃음이 터져나온다. 왜 웃는지, 뭐가 웃긴지. 그런 이유는 없었다. 모든 감정이 씻겨나가고 남은 깨끗한 웃음이었다.

 

생일 축하해.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삶이 어떻대도, 내가 너의 생을 축하해. 너를 만나고 살아가는 이유가 생겼어. 뿌옇던 하루가 선명해졌어.

 

너를 만난 후로 흑백이던 일상이 물이 들었어. 파랗고, 노랗고, 환한, 빛이 생겼어.

 

두 소년은 마주보고 오래도록 웃었다. 이렇게 웃으려고 그동안 아팠었나, 착각할 만큼. 행복한 미소였다.

 

 

*

 

 

행복의 대가인지. 그날 이후의 나날은 쓰기만 했다. 그래도 미도리야는 후회 없었지만, 바쿠고는 후회했다. 자신의 욕심이 과했다고. 많이 후회했다. 미도리야가 앓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돌아온 미도리야를 보고 화가 난 엄마는 외출을 금지시켰다. 바쿠고가 담 주변을 얼쩡거렸지만, 이전과 다르게 미도리야가 창밖으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미도리야는 바쿠고와 어울리는 모습을 들키면, 두 번 다시 바쿠고를 못 볼 수도 있다는 걱정에 그리움을 꾹 참았다. 창문에 조약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불을 움켜쥐고 울먹거렸다. 바쿠고는 미도리야 방 안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머리가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그려냈다.

 

그날도 미도리야 집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안 나올 거라는 걸 알면서, 어쩌면 오늘은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세었다. 바쿠고는 이제 저 별자리의 이름을 알았다. 카시오페아 자리, 게 자리. 게 자리는 미도리야의 별자리였지.

 

담 아래에서 신발을 직직 끌며 걸었다. 그때, 낡은 철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미도리야는 소리가 안 나게 철문을 여는 걸 잘했다. 그 희미한 소리는 바쿠고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쿠고가 깊게 그리워 한 소리였다.

 

“캇쨩…….”

 

저 목소리도. 그랬다. 그리워했던 음성.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괜한 심술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치하게 굴기엔 시간이 아깝다는 걸 알면서도, 솔직하기가 힘들었다. 망할 천성이다. 후회할 걸 알면서도 후회할 짓을 사서 했다.

 

“꺼져.”

“캇쨩.”

“짜증 나니까 꺼지라고. 들어가서 잠이나 처자.”

“…….”

“고작 그딴 걸로 아플 거면 어떻게 사냐? 차라리 일찍…….”

 

차라리 일찍 죽어버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말문이 턱 막혔다. 울음이 치받쳐서 목울대가 뻐근해졌다. 망할,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억척스러운 손을, 미도리야의 작은 손이 따뜻하게 덮는다.

 

“캇쨩도, 나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 말에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뒤를 돈다. 이제야 보네. 미도리야가 눈꼬리를 접으며 활짝 웃자, 고여 있던 눈물이 광대를 타고 흘렀다. 보석 같은 주근깨가 박혀있는 뺨을 바쿠고의 엄지가 훑고 지나간다. 하지만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 “울보 새끼.” 바쿠고는 자신도 울고 있으면서, 그렇게 말한다.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뒷 머리를 감싸고, 당겼다. 이마를 맞댄다. 코끝이 맞닿는다. “아프지 좀 마라. 제발….” 아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하고 대답하는 미도리야의 목소리 끝이 슬프게 갈라졌다.

 

 

*

 

 

염원과 달리 미도리야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결국, 미도리야의 엄마는 도심의 큰 병원에 재입원하기를 결정 내렸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쿠고는 새벽부터 심장이 다 터져나갈 지경까지 다이빙을 반복했다.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 같은 이 고통이 바다의 기압차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다. 전처럼 바다에 뛰어 들면, 감정을 눌러 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달랐다. 이미 바다는 미도리야와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참았던 감정은 결국 선착장 앞에서 울음으로 터졌다. 출항을 준비하는 뱃소리가 들리자, 바쿠고는 더 참지 못 하고 맨발로 달려갔다. 또 다시 후회할 짓을 할 순 없었다. 다이빙하던 몸으로 달려온 바람에, 온몸에서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코끝과 턱 끝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닷물인지 눈물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게 뭐든 간에 미도리야는 물방울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싶었다. 자꾸만 뿌얘지는 시야를 걷어내려 눈을 벅벅 닦았지만,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언제부터 울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별거 아닌 걸로 울지 말라니까.” 그런 말을 하는 바쿠고의 눈도 붉었다.

 

“나 봐.”

 

말을 내뱉는 카츠키의 숨이 울음으로 거칠었다. 미도리야의 손목을 잡아서 자기의 뺨을 감싸쥐도록 했다. 그 손목이 너무 가냘파서, 또 울컥한다. 미도리야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구나. 가지 말라는 말은 더더욱 심연 아래로 가라앉았다. 미도리야가 말도 못 꺼낼 만큼 엉엉 울고 있었기에, 바쿠고는 거친 숨을 다잡으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어. 우리 다시 만날 거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죽지 말고, 라는 말이 함축된 말이었다. 미도리야는 히끅거리느라 대답하지 못 하고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그래도 바쿠고는 그 목소리가 다 들리는 듯했다.

 

처음으로 미도리야를 마주 끌어안는다. 떨리는 손으로 투박하게 미도리야의 등을 쓸어주었다. 따뜻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옷으로 스며들었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단단한 가슴팍과, 거센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바쿠고와의 약속을 온몸으로 새기는 기분이었다. 미도리야는 울음만 터지는 입으로 겨우 “응.” 하고 답한다. 바쿠고가 다정하게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

 

 

도시로 돌아왔고 또 다시 입원이었다. 미도리야는 그날 입은 흰 티셔츠를 빨지 않은 채로 고이 접어 간직했다. 그 티셔츠에 물든 바닷물과 바다 내음, 그리고 바쿠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잊고 싶지 않았다.

 

이전 치료와 달리 정신과 마음이 결연했다. 이제는 그 아픈 치료를 견뎌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수술 전 마취를 받을 때, 이 풍경이 생의 마지막이어도 별로 슬프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라도 삶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싶었다. 너무너무 힘들 땐, 그 여름의 기억들을 꺼냈다. 닳을까 봐 걱정될 정도로 빛나는 기억들이었다. 그 기억들이 가녀린 불씨 같았던 미도리야의 숨을 지켜냈다.

 

마지막 수술을 앞둔 날이었다. 미도리야는 링거대를 끌면서 비척이며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병원 홀에서는 스포츠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얼굴이 화면 가득 잡히는 것이다. 심장이 덜컹, 한다. 손발이 저릿해진다.

 

“잠깐, 잠깐만. 엄마.”

 

티비 가까이에 선 미도리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오픈 주니어 챔피언쉽 남자 플랫폼 우승, 바쿠고 카츠키 선수의 영상이었다. 왼쪽 상단에 ‘플랫폼다이빙 유망주 바쿠고 카츠키’라는 타이틀이 박혀 있었다. 프레임 속 소년은 신기록을 달성하고서 포효하고 있었다. 그의 턱선과 몸의 근육이 전보다 날카로워지고 단단해져 있었다. 너는 끝없이 성장하는구나. 바쿠고를 처음 보았던 그 예전처럼 심장이 뜨거워졌다.

 

경기 리플레이 영상이 끝나자, 측근들의 인터뷰 영상이 이어진다. 바쿠고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라는 남성과, 바쿠고의 어머니, 섬 주민들……. 그들은 하나같이 바쿠고의 불우했던 가정환경과, 어려운 환경 속에도 꿋꿋했던 꿈에 대한 의지에 대해 얘기했다. 섬에서 한식집을 했던 아주머니는 바쿠고가 어렸을 때부터 어찌나 다이빙을 좋아했는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그 이후로는 바쿠고 선수의 인터뷰 영상이 이어졌다.

 

- 바쿠고 선수,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벌떼 같은 취재진을 헤쳐가며 걸어가던 카츠키가 그 질문을 듣고서는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또렷하게 말했다.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한테, 너도 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쑥스러운지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자리를 뜬다. 두려움에 탁해지고 있던 약속이 다시 선명해진다. 오랜만에 미소를 짓는다.

 

 

*

 

 

국가대표 선발전. 바쿠고 카츠키 선수는 자신의 이전 기록까지 돌파하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어리고 잘생긴 유망주에게 취재진과 관중들의 관심이 쏟아진다. 소독제 냄새와 군중들의 소리가 가득한 이곳에서, 바쿠고는 하나의 음성을 찾고 있었다. 바쿠고는 이곳에 미도리야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드디어 시작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데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처음으로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꿈이 생겼다고, 믿어달라고. 그 말을 하기까지 수많은 시나리오를 만들어 재생했다. 얻어맞는 것까지 각오한 상태였다. 아버지처럼 이곳을 떠나겠다는 자식이 얼마나 미울까.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눈물을 훔치며 바쿠고의 어깨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예상한 적 없는 상황에 눈물이 터졌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를 타고 섬을 떠났다. 도시 사람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고, 뒤통수도 많이 맞았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미도리야만 볼 수 있다면 그깟 고생쯤은 전부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고 싶어서, 혹은 살고 싶어서 뛰어들었던 바다를 네가 바꿨다. 밤톨만한 네가 내 삶을 바꿔 놨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는 있냐. 멍청아.

 

바쿠고는 취재진과 관중들이 버글대는 무리를 뚫고 무작정 걸었다. 이곳에 미도리야가 있다. 물증이 없어도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미도리야도, 수많은 고생길을 뚫고, 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걔는 분명 그럴 애다.

 

“캇쨩.”

 

맥아리 없는 조그만 목소리였다. 하지만 바쿠고에게는 선명하다. "존나 데쿠처럼 말하네, 안 들리게." 씩, 웃으면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방향을 튼다. 눈을 감고 계속 걷는다. 눈을 감아도 그 눈부신 풀빛이 선연해서, 너무도 환하게 빛이 나서 웃음이 터진다.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웃음이 길 위로 뚝뚝 떨어졌다.

 

작고 여린 손이 바쿠고의 단단한 손을 잡아온다. 눈을 뜨자 그리웠던 얼굴이 바쿠고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햇살로 자글거리는 수면처럼, 사랑스러운 주근깨가 흩뿌려진 뺨이 웃음으로 봉긋하다.

 

바쿠고가 갑작스럽게 끌어안은 탓에 미도리야는 손에 쥐고 있던 완치 판정 진단서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미도리야는 상관없다는 듯 바쿠고를 따라 소리 내어 웃는다. 또 한 번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한품에 안겨오는 이 작은 소년에게 생애를 내내 생일처럼 빛내 주고 싶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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